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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억/느낌

역사를 보는 자신의 눈을

올바른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 한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괜히 끼어들어 가치관에 관련된 핀잔성의 답글까지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린 걸까?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있고 또 그 다양성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여러 오해들을 풀기위해 우리는 공부하고 배우고 듣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정말 아직도 배울 점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역사는 왜 배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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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어린 시절 국사 과목을 학교에서 배울 때는 그냥 암기과목 이였다.
세계사도 마찬가지지.
하물며 도덕도 그러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은 몇 년도에 일어났나.
태정태세문단세 등등의...

역사는 반복이라고 한다.
이 과거의 일어난 사건과 배경과  선조들이 살아온 환경과 흐름이 어떻게 변화되고 이루어지고 하는 것들을 배우는 것은 현세를 살아가면서 때론 다시 밟지 말아야 할 과오나, 난관에 대처했을 때  슬기롭게 헤쳐 나갈 지혜를 느끼기 위함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 때에는 항상 그해 학기말 쯤 되어서는 진도 문제등과 시험출제율이 낮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광복 이후의 근대사나 현대사에 대해선 제대로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한분도 안계셨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지금을 과거의 사건과 비교해 표현해 가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지도를 내려 주시는 분은 나는 만나지 못했다. 이게 시험에 잘나온다고 찍어 주시는 선생님이 유능한 선생님이셨다.
어쩌면 옳은 소리하다가는 크게 문제되고 불온사상범으로 잡혀갈 수도 있었던  그 서슬 퍼런 시절의 폐해일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국어 교과서에서는 한 남파 간첩의 고뇌에 대해 자수를 권유하는 친구의 얘기를 담은 희곡이 있었고, 나는 수업시간에 단상에 올라 몇몇 급우와 연극까지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아는 게 정말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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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보고 싶다


점점 내가 나이가 먹어 가면 갈수록,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혀왔던 사고방식과는 영 다른 모습들을 실사회에서 많이 보게 되었다.
목적에 의해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고 귀마저 자기에게 좋은 소리만을 들려주었던 여러 상황과 그 당시 언론의 모습은 아, 내가 그 교과서 책으로 공부했던 북한 공산당이 쓴다는 '세뇌교육' 이란 것을 받아왔고 받는 중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기억해보면 맨 처음은 내가 아주 어렸을 당시 만화책을 보고 나서였다.
훗날 '먼 나라 이웃나라' 를 쓰신 이원복 교수의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

그 당시 꼬맹이 사이에서 제일 큰 욕은 "빨갱이"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얘기다.
한참 다투다가 막힐 때면 "너네 아빠 빨갱이라며?" 그런 욕을 서슴지 않고 꼬마애 들이 했었던 듯하다.
어느 아이는 "아냐! 우리 아빠 빨갱이 아냐!" 하며 더 이상의 대응을 못하고 엉엉 울던 적도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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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시보고 싶지 않다

해마다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포스터 대회, 반공 표어 짓기 대회 등이 있었다.
누가 빨갱이 공산당들을 무섭게 그리느냐, 얼마나 공산당들이 나쁜 놈들이냐, 어떻게 박멸해야 되느냐의 정도에 따라 수상이 결정 되었던 듯도 하다.(난 4학년때 전국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특상을 받아 소년신문에 사진도 실렸었다 ㅠ.ㅠ)

그러고 보니 정말 많았구나...
여름철 개봉하는 만화영화속의 김일성도 돼지였고. 삐라 줏어오면 선물 준다고 해서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한참 찾던 기억(하나도 못찾았다), 우리의 영웅 이승복의 '난 공산당이 싫어요' 등등의...

그러나 세계를 여행하는 이 만화 모험담에 그려진 이탈리아 공산당의 모습은 몸이 온통 빨간색의 괴물도 아니었고, 머리에 뿔이 달린 존재도 아니었다. 내가 놀랐듯이 만화속의 주인공도 놀라면서 똑같은 사람이고 단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어떻게 심의를 통과했을까? 아마 다 안읽어 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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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였던 것 같다.
아침 등교 하는데 호외가 뿌려지고 있었고 어떤 학생들은 길에서 울기까지 했다.
나라가 망하는 거 아니냐며 온통 난리 였었고 우리는 가슴에 까만 리본을 한동안 달며 학교에 다녔다.

한참 후에야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유명가수와 예쁜 여대생을 옆에 끼고 술판 벌이다가 측근에게 총격.

그 모습은 나라의 아버지라 칭하며 많은 이에게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되던 그런 모습은 분명 아니었었다.

그것도 정말 한참 후에야 루머로만 들리던 사실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그다음에 확실하게 무언가가 틀리구나 느꼈던 때는 '광주사태(그 당시 표현)' 이였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무슨 폭도들이 경찰서를 점거하고 총기를 훔쳐가서 어쩔 수 없이 군대가 진압에 나선다는 내용이 보여지고 있었다. 항간에는 별의별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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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보다 하고 있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가지고 오신 "TIME' 지와 "NEWSWEEK" 잡지를 보곤 충격 받았다.(그 당시 아버님은 미군부대 교역처에서 근무하시고 계셨다)
내가 TV화면에서 보던것, 신문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그 잡지에 나온 사진들은 사뭇 표현하기 어려운 낭자한 선혈로 얼룩지어진 시민의 시체들이였다. 수많은 시체들이 코에 솜을 틀어막은 채로  태극기에 휘둘려져 관에 뉘어져 있는 모습은 내가 방송에서 보았던 단순한 폭도들의 모습이 아닌 무슨 열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땐 영어독해란 꿈도 꾸지 못할 시기였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한 사진의 플래카드에 쓰인 한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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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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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그냥 발췌


"전두환 찢어죽여라" - 사실 사진을 봐서 알겠지만 성이 전씨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
두환이 도대체 누구지? 왜 그렇게 험악한 글씨를 썼을까?

왜 이런 것들을 방송에선 안 내보내는 걸까? 그때 정말 궁금했었다. 순진하기는....
그러다 한창 인기방송국이었던 TBC가 정말 재미없었던 KBS와 합쳐진다고 했을 떈 의아해하고 왜 마지막 방송 때에 출연자들이 질질 울고 난리일까 정말 몰랐다. 80년대 언론사13 - 언론통폐합과 고별방송

얼마 지나지 않아 TV에서는 수많은 인사들에 휩싸여 민정당이라는 당기를 휘두르며 당수에 오르는 "전두환' 이라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 우리 학교 교실에는 박정희, 최규하에 이어 그의 사진이 걸려 있게 된다.
역시 그로부터 얼마 후 삼청교육대, 방송에서는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깡패나 파렴치범들을 잡아  "정신~ 통일!" 외쳐가며 군대교육을 받는 화면이 보인다.

관점의 차이란 무엇일까?

광주사태 이후 3년이 지나 우리 학교로 광주에 살던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친하게 어울리다가 몇몇 얘기를 할 때면 그녀석의 얼굴은 어두워졌었다.
집에서 한발자국도 못나오고 지냈다는 얘기.
옆집 아저씨, 잠깐 대문으로 밖이 어떻게 돌아가나 얼굴 내밀었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 맞아서 죽은 얘기.
라면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웃들의 얘기.
이들은 폭도고 아니고 선량한 시민들이였다.
이 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 하였다.

그 나이에 무얼 알겠냐만은, 정말 이런 모습들을 제대로 내보내지 않은 언론들이 이해가 안되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외국잡지를 보는 구나(그 당시 멋진 남자의 모습은 TIME 지를 옆에 끼고 다니는 명문대 학생들 이였다). 이래서 언론 통폐합이니 했었던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다.
내가 보는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구나 느껴져 갔다.

고등학교 때 즈음에서는 이 군정과 고려 시대의 '무신정변'과의 차이점과 같은 점을 비교하기 시작하며. 도덕책에 나오는 북한은 주민끼리 서로 감시 한다는 "5호담당제"를 읽으며 우리나라의 '반상회' 와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같은 것 아니냐는 시선도 갖게 된다.
정말 웃긴 것은 학교에서 적성검사를 받았을 때 거의 모두가(사실 전부였다) 모두 군인 이였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우연히 버스에 누가 두고 내린 "한겨레신문' 을 읽고 아침에 읽은 '조선일보'와 비교해 똑같은 사건을 이렇게 틀리게 보도하는 가에 관점의 차이도 느끼고 나서는 더 이상 내가 보고 듣는 것에 적극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데모에 관련해서 '경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와 '학생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의 차이였다)
책에서 읽던 '419혁명'은 혁명이고 이 같은 대학생 형, 누나들의 운동은 정말 북한지도층의 사주를 받은 불온사상인 들이 뒤에서 조종하는 걸까?

그후로 오랜 시간, 항상 선거가 있을 때마다 나오는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식의 기사를 읽으며 신물을 느꼈고, 그때마다 일어나고 발견되는 희한한 사건들, 말로는 대화합을 부르짖으며 철새처럼 이동하는 여러 정치인들, 지식인들을 보며 다 자기 실속을 차리기 위해 그러는 구나 알았다.

모든 것들이 마치 카드 게임을 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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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마르셀루스 쿨리지의 1903년 작 '포커치는 개들'


일반적 흐름에 갑자기 레이스를 치는 사람을 보며 "뭔가 사연이 있겠지. 뻥카냐? 좋은 패냐?" 를 의심하는 것처럼 모든 주장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처해진 배경이 그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알려지는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입장의 차이에 따라 진실은 왜곡되어 질 수도 있고 그에 휘둘리면 나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할 수도 있다는 안목을 세우게 되는 듯 했다.

그때부터는 항상 어떤 주장을 들을 때면 반대의 주장도 들어보려 노력하게 되고 가능하면 3자의 얘기도 들어보며, 어떤 것이 올바른 판단이며 올바른 행동일까 내가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생각만 이렇지 실상에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역실하게 느낄 때가 많다.
그리고 실천하지 못한 때가 더 많다.

한 친한 친구(보수 성향이다) 에게서는 "너는 빨간색도 아니고 분홍색이야. 그게 더 나빠!" 라며 핀잔까지 들을 때면 정말 내가 많이 아는 게 없어서, 뭐라 내 자신을 변명하고 보호할 수 있는 언변의 능력과 지식이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낄 때도 있었다.

언젠가 누나집에 놀러 갔다가 굴러다니는 책중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를 빌려와 읽고 나서는 그래도 그 친구에게 어느 정도 변명거리는 둘러댈 수 있는 말발이 잠깐 섰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참 돈벌고 일하고 생활사에 찌들어 가다보면서는, 무슨일이 있을 때마다 '사치스럽게 무슨 골치아프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신경 써~, 다 그놈이 그놈이야' 라는 삐뚤어진 시선 가긴 때가 더 많았다.
선거때도 그거 잠깐 가서 찍는 것 귀찮아서 어디 놀러다니고 했었었다.

난 아직 너무도 모르고 배울 것이 한참 많은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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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그럼 어때! 세상엔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안 그래?

그런데 정말 우연찮게 요즘 읽게 된 한 책의 첫 구절에서 예전의 내 마음과 동감 가는 글을 접했을 때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대한민국사' .

그리고 4권으로 이루어진 그 내용들을 읽어보면서(도서관에 1~3권 밖에 없어서 4권은 아직 못읽었다) 정말 이런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았었구나 하는 자괴감까지 느꼈다.

물론 이는 작가의 시선으로 쓰인 글이겠지만 역시 세상엔 이런 시선으로 살아가야 많은 것을 놓치지 않는다는 그 때의 내 기준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나는 그냥 이렇게 살란다.


이 책의 머리말만 발췌해 본다.


<역사를 보는 자신의 눈을>



네 말도 옳고, 내 말도 옳고

역사의 '객관적 서술' 이란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 '고상한 꿈' 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꿈이 과연 채워질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관점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역사상의 사건들에는 숱한 이해당사자들의 상충하는 이해가 얽히고 설켜 있으며 어느 것 하나 단순한 것이 없습니다.

황희 정승의 옛이야기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두 사내가 다투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황 정승은 다가가 연유를 물었고, 한명이 먼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황정승은 "네 말이 옳구나"(汝言이 是也라)라고 답했읍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펄쩍 뛰며 억울한 것은 자기라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황정승은 이번에도 "네 말이 옳구나" 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 정승의 하인이 나섰습니다. " 아니 대감마님, 두 사람이 싸우는데 어찌 양쪽이 다 옳을 수 있습니까? 필경 어느 한쪽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황 정승은 "네 말이 또 옳구나"(汝言이 亦是也라)라고 답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최고의 명재상이라는 황희의 판단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일까요? 그런 해석도 가능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황희의 고사에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서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그리고 살고 있는 세계는 상충하는 이해의 충돌과정이었고, 그것을 기록한 역사 서술이나 사료는 대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해관계에서 어느 한쪽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서술이나 기록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말도 안 되게 엉성하거나, 역사가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사건을 둘러싼 상반된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 사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고,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처지에 당사자들의 주장만 들을 경우 그들의 주장은 다 그럴듯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할 뿐

똑같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나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예리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남긴 <라쇼몽>(羅生門)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극화한 이 영화는 부부가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남편은 살해당하고 아내는 겁탈 당한, 어찌 보면 사실관계가 아주 단순한 강도살인, 강간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도적의 입장에서, 아내의 입장에서, 무당의 입을 통해서 죽은 남편의 입장에서, 그리고 숨어서 사건을 지켜본 나무꾼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여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너무나 다른 네 편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교토 지방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도둑이라는 다조마루는 그가 여자를 겁탈하고 남편을 죽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칼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로 또 다른 겁쟁이인 여인의 남편과의 싸움에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으니까요. 자도마루는 도적으로서 자신의 허명만이라도 지키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다조마루의 이야기는 여인의 강인함을 강조했지만, 여인은 자기의 약함을 눈물로 호소합니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 남편은 자기가 몸을 버렸다고 냉랭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여인은 남편에게 자기를 죽여줄 것을 호소합니다. 그 여인은 결국 남편을 죽이고 자살하려 했으나 자살에 실패했다고 울면서 말합니다. 무당의 입을 통해서 죽은 남편은 아내를 비난합니다. 아내가 도적 다조마루에게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다조마루와 달아나다가 멈춰선 아내는 도적에게 남편을 죽이고 가자고 말했고 도적조차 그 말에 놀랍니다. 다조마루는 여인을 쓰러뜨리고 발로 밟고는 남편에게 이 여자를 죽일까 살릴까 물었습니다. 마침 여자가 달아나자 다조마루는 여자를 쫓아갔다가 몇 시간 뒤 돌아와 남편을 풀어주었습니다. 다조마루가 떠난 뒤 남편은 배신감 때문에 자살했다고 말합니다.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어서 객관적 입장이라 할 수 있는 나무꾼도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사건의 현장에서 값비싼 단검을 훔쳐갔으니까요.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보고, 영화에 등장하는 승려는 이런 인간사의 모습이 전쟁이나 지진, 화재나 역병보다 훨씬 더 무섭다고 탄식합니다. 반쯤 부서진 건물에 라쇼몽이란 현판이 걸린 큰 문 아래세서 비를 피하면서요.

<라쇼몽>보다는 격이 한참 떨어지지만, 요즘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영화 중에서는 <커리지 언더 파이어>(Courage Under Fire)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식으로 미국의 양심이 승리를 거두어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너무나 손쉬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장들이 실상은 잘 포장된 거짓일 수 있다는 점을 나름대로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신채호는 사기꾼?

아마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는 테러리즘에 반대할 것입니다. 저 멀리 유럽이나 중동에서 이름도 생소한 아랍의 무장세력에 의한 테러행위가 발생하기만 하면 예외없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테러리즘을 비난해 왔으니까요. 그러나 안중근 '의사' 는 어떻습니까? 기차에서 내리는 비무장 정치인을 권총으로 암살한 행위, 바로 전형적인 개인테러행위 아닐까요? 그런데 테러리즘 일반이 나쁜 것이라면 유독 안중근 '의사' 의 '의거'는 훌륭한 행위일 수 있을까요? 안중근 의사의 행위가 옳은 일이었다면, 어떤 테러행위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명제가 잘못된 것이고, 테러리즘 일반이 나쁜 것이라면 안중근 의사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어떻습니까? 변절의 기미가 보이는 이광수를 꾸짖기 위해 세수할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으셨다는 그분을 많은 역사학자들은 우리 독립운동의 고고한 지사로 주저없이 꼽습니다. 그러나 이분도 일제관헌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고고한 지사이기는 커녕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질서를 교란한, 요즘으로 치면 유가증권 위조의 파렴치범입니다.

문제는 관점과 기준입니다. 일어난 일은 분명 하나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분명 이토 히로부미를 쏴죽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분명 유가증권을 위조했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국의 의병장으로서 우리를 침략하는 일본국의 수괴 이토를 사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입장에 서느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느냐, 아니면 일제의 입장과 일부 겹치기도 하지만 모든 개인테러행위를 비난하는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래서 역사는 골치 아픕니다.

세상일도 골치 아프고, 역사 역시 골치 아픕니다. 역사를 공부한 죄로 어쩔 수 없이 골치 아픈 이야기들을 풀어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그리고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을 다 믿을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꿈같은 세상이 앞으로 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분명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품는 자세, 세상일을 판단하는 자신의 관점을 확고히 하는 입장,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도 엄격함을 유지하려는 자세가 필요 합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고, 또 자신의 판단까지도 의심해보는 그런 자세 말입니다.

이중잣대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그런 자세를 말하는 것이지요. 쉽게 얘기해서 남이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랄까요? 기회주의자 박정희를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자식들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일제의 학살만행과 정신대 만행에 분노하고, 노근리 학살에 참담해 하면서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의혹을 방치해둘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이래서 골치 아픕니다.

역사를 산다는 것

세상이 참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고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혼돈된 현실 속에서 저희같이 직업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역사를 돌이켜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분단과 통일, 주한미군 문제를 비롯한 미국과의 관계, 독재잔재의 청산, 경제개혁 등등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는 다 얽히고 설킨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역사를 이야기하게 되는 때인가 봅니다. '역사' 하니, 문익환 목사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산다는 것이라는 말씀이 말입니다. 여기 모은 글들은 오늘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부딪히게 되는 사건이나 제도, 생각 등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보려는 작은 노력입니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6월항쟁에 관한 비디오를 틀어주다가 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리웠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한열이의 장례식 날, 시청 앞 광장이 꽉 찼는데 아직도 대열의 후미는 연세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 인파. 오늘의 혼돈된 현실 속에서 그 사람들도 그 어딘가 굽이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를 살아갔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2003년 1월
한홍구